나의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교차점,
그곳에서 찾은 특별한 일상의 가치를 발견하는 시간
“인생의 서사는 자신이
머무른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매일 어딘가에 가서 누군가를 만나고 그곳에서의 경험을 간직한다. 특별한 시간을 보낸 공간을 떠올리며 순수한 마음으로 살아갔던 그때를 추억하기도 하고, 세월의 흐름을 아쉬워하기도 한다. 현실에 치여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고 있지만, 누구나 마음 한 구석에는 나만의 도피처 같은 추억의 공간이 있다. 어린 시절 뛰어놀던 집 앞 골목길, 엄마 손 잡고 처음 가본 동물원, 친구들과 계획 없이 찾아간 바다, 몇 시간이나 지치지 않고 수다를 떨었던 카페… 평범한 일상이지만, 특별한 시간이 머문 공간들에서 보낸 경험은 절대 평범하지 않다. 화려하고 멋진 여행지보다 소박하지만 정겨운 동네를 떠올릴 때 마음이 한결 따뜻해지고 여운이 남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의 시간은 그렇게 우리가 사는 공간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조금 알고 적당히 모르는 오십이 되었다』, 『이토록 멋진 오십이라면』 등을 통해 오십 이후 삶의 태도와 두 번째 인생을 준비하는 방법을 전한 이주희 작가가 신작 에세이 『모든 순간의 공간들』을 선보인다. 이 책은 작가 자신의 서사를 만든 스물네 곳에 얽힌 에피소드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삶의 의미와 가치를 담았다. 목욕탕, 시장, 카페, 수선집, 도서관, 스포츠 센터, 미술관 등 평범하고 친숙한 일상의 장소에서 과거의 ‘나’와 현재의 새로운 ‘나’를 만난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머물러 있는 공간은 우리에게 고요히 메시지를 남긴다. 일상의 공간은 추억할 가치가 있으며, 생각은 정체되어 있지 않고 늘 새로워진다는 것을. 기억의 파편을 찾아 그동안 놓치고 있던 추억의 공간을 떠올려보자. 진정한 나를 발견함과 동시에 앞으로의 일상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될 것이다.
프롤로그: 우리의 시간은 우리가 사는 공간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1장 타인의 시선에서
#1 목욕탕: 나신(羅身)의 만남, 따뜻한 위로와 포옹이 되길
#2 카페: 커피 한 잔에 자발적 고독, 내면의 성숙을 담는다
#3 영화관: 영화관에서 우리는 친구, 연인, 이웃으로 남을 것이다
#4 절, 교회, 성당: 나와 연결된 이들의 평안을 빕니다
#5 미술관: 감수성이 한 움큼 성장했습니다
2장 가족의 이름으로
#6 식당: 함끼에서 혼밥까지, 우리 함께해요
#7 예식장: 사랑, 불태우지 말고 그대로 얼리세요
#8 장례식장: 식혜와 춘삼이가 답을 줄 것이다
#9 병원: 그때는 신경성이고 지금은 갱년기입니다
3장 함께 살아간다는 것
#10 학교: 향기롭고 따뜻한 기억으로 남기를 바라
#11 마트, 시장: 사는 건 결국 ‘사는’ 일이다
#12 홈쇼핑, 온라인 쇼핑: 할인의 유혹은 달콤하지만 그 끝은 쓰다
#13 화장실: 휴식의 방, 이제 안전을 갖춰야 할 때
#14 동물원: 각자의 영역에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며 살아요
4장 나, 그대로인 듯 새롭게
#15 미용실: 머리의 일을 머리카락에 위임하지 말자
#16 공항: 오래도록 촌스럽고 서툴게 남아 있기를
#17 산, 바다, 강: 경계 없는 쉼터에서 마침내 창대해지리라
#18 중고마켓 플랫폼: 비워내는 재미, 나눔의 기쁨을 누리다
#19 스포츠 센터: 회피가 아닌 체력으로, 나를 지키는 법을 배워요
5장 살아온 날들, 그리고 살아갈 날들
#20 수선집: 추억이 깃든 물건을 오래도록 돌본다는 것
#21 기차역: 토끼처럼 빠르게, 거북이처럼 여유롭게
#22 복권 판매소: 매주 판타지와 설렘을 삽니다
#23 공공도서관: 독을 빼내고 부끄러움을 채웁니다
#24 텃밭: 넘치지도 과하지도 않는, 적당함의 미학
에필로그: 보통의 하루에서 특별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기를
특정한 공간에서의 특정한 경험은 때로는 인생 전체보다 더 서사적이어서 하나씩 꺼내어 살피다 보니 더 확장된 나를 만날 수 있었다. 어떤 기억은 단단한 박음질로, 어떤 장소는 성긴 홀치기로 남아 있었지만 그 모두가 나를 지탱하는 대들보임을, 나라는 옷을 지은 재료임을 깨달았으니 그 모든 시간과 공간에 감사하다.
--- p.8 「프롤로그 _ 우리의 시간은 우리가 사는 공간에서 비로소 완성된다」중에서
사회 지도층들이 더 딱딱하게 굳어지기 전에, 정기적으로 ‘목욕탕’에서 함께 목욕하는 날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아니 아예 달력에 빨갛게 표시해서 온 국민이 홀짝제로 목욕하며 쉬는 공휴일, ‘목욕의 날’을 제정해 공표하는 것도 좋겠다. (중략) 목욕탕에서 마주한 사람 사이에는 뭔가 벗은 몸에는 가난과 차별, 무시와 조롱이 들어설 틈이 없다. 모든 오해와 고집, 무지, 그리고 혐오가 때로 밀려 하수구로 흘러 들어가고 따뜻한 위로와 포옹이 남기를 바란다.
--- p.23 「1장 #1 목욕탕 _ 나신(羅身)의 만남, 따뜻한 위로와 포옹이 되길」중에서
밥상 노동은 그 강도와 빈도에 비해 터무니없이 저평가된 노동 중의 하나다. 평생 쉬지 않고 오르고 내리는 밥상을 위해 가족 중 누군가는 매일 부엌에 선다. 하루 세끼를 차려내는 일은 생의 마지막까지 계속되기도 한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도 세 남매의 엄마는 밥하다가, 밥하다가 죽었다. 압력밥솥에 밥을 올려놓고 자는 듯 세상을 떠났다. 죽어야 밥에서 해방되는 삶이라니.
--- p.70 「2장 #6 식당 _ 함끼에서 혼밥까지, 우리 함께해요」중에서
밤에 혼자 화장실에 갈 수 없어 곤하게 자는 자매들을 깨우다보면 싸우기 일쑤였다. 결국 엄마는 특단의 조치로 딸들의 방에 반질반질한 요강을 넣어주었다. 엄마는 자식들이 분수에 겨워 흰소리를 할 때마다 ‘호강에 겨워서 요강에 똥 싼다’는 말을 했는데 그것이 얼마나 큰 호강인지 귀에 쏙쏙 박혔다. 내시와 지밀상궁이 보는 앞에서 ‘매우틀’에 앉아 용변을 해결한 임금과 동급의 호사를 누린 것이다.
--- p.138 「3장 ##13 화장실 _ 휴식의 방, 이제 안전을 갖춰야 할 때」중에서
머리카락을 자른다고 흔들리는 결심, 부패한 마음이 사라지는 게 아닌데 큰아이나 나나 머리가 해야 할 일을 자꾸 머리카락에 위임하니, 머리카락만 고생인 거였다. 삼손도 머털이도 머리카락에 대단한 것을 숨겨놓은 것 같지만 몸과 머리와 마음이 해내는 일인데 우리는 자꾸 그걸 잊고, 속는다.
--- p.166 「4장 #15 미용실 _ 머리의 일을 머리카락에 위임하지 말자」중에서
아이는 다른 멀쩡한 패딩은 제쳐두고 겨우내 상처를 꿰맨 패딩만 입었다. 자신의 부주의로 흠집을 낸 옷에 대한 애틋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그 겨울, 수선집에서 건강한 모습을 되찾은 패딩은 작은아이와 함께 공동의 추억을 쌓았다.
--- p.216 「5장 #20 수선집 _ 추억이 깃든 물건을 오래도록 돌본다는 것」중에서
삶은 지극히 사소한 일들을 얼마나 잘 해냈느냐에 따라 평가된다고 했다. 매일 헬기를 타고 제트스키를 타고 열기구를 탈 수는 없는 일이다. 일상의 합이 삶이고, 우리의 삶의 합이 역사라고 한다면 지금 뚜벅뚜벅 걸어가는 모든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곧 역사가 될 것이다. 나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보편의 역사를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
--- p.264 「에필로그_보통의 하루에서 특별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기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