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답이 없음을 깨우치는 ‘물음의 지혜’
1장 인생의 꼴: 나 자신을 돌아보는 ‘주제 파악’의 시간
“왜 그래?”와 “괜찮아” 사이
그런대로 산다는 것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는 우리
이유는 나에게 있다
우리는 자신 안에서 스스로를 속인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주인이 아니다
인간은 부분도 아니고 파편이다
무엇을 얼마나 모르는지도 모른다
편견이 ‘무지’인 동시에 ‘폭력’인 이유
세상은 ‘원인과 결과’로만 이해할 수 없다
순수가 오히려 자기를 파괴한다
‘괴로움’이라는 진리
과연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고 싶을까?
거친 땅이 오히려 걷기 좋다
공상적 사랑과 실천적 사랑
무관심보다 미움이 더 낫다
돌아보지 않으면 길이 아니다
‘왜 사는가?’라는 물음의 뜻
썩어 없어지는 가운데 솟아나는 생명
몸이 몸에서 몸으로 깨달아야
‘우주’라는 이름이 지니는 뜻
알고 있는 것은 부분일 뿐이다
물음만으로 충분하다
어른이 되어 마주한 노을
2장 인간의 틀: 우리가 한계에 부딪히고 넘어서려는 이유
인간이 ‘종교적’인 까닭
인간의 실마리는 ‘몸’에 있다
종교가 아편으로 작동할 때
‘구원받았다’는 착각과 강박
자유를 달라고 해놓고 도망치는 인간
우리가 만든 세계에 도리어 포로가 되는 우리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종교
우리가 믿는다고 할 때 과연 무엇을 믿는가?
우리는 과연 누구에게 기도하고 있는가?
의심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참된 믿음은 ‘못 믿겠다’는 절규에서 시작된다
미워할 수 없는 신은 신이 아니다
고통은 극복되기보다는 겪어가는 것
성급하게 소유하지 않는 ‘기다림’의 힘
‘무소유’를 소유하려는 유혹
무엇이 먼저인가?
‘애증’으로부터 비롯되는 더욱 깊은 관계
그림은 한낱 그림이 아니었다
천지는 어질지 않다
문제로 뒤얽힌 삶을 즐기는 법
자연의 벌레소리가 더 신성하다
통계로 추려낼 수 없는 기도의 진심
덩달아 즐거워할 만큼 기뻐하라
종교는 역설이다
자유가 너희를 진리하게 하리라
3장 지혜의 길: 정답 없는 삶을 내다보는 역설의 통찰
해답이 없다는 것이 해답
지혜는 ‘모름’에서 나온다
손 놓고 잊어버릴 때 문제가 해결된다
‘비움의 쓰임’으로 ‘채움’이 이루어진다
죽음은 삶을 몇 배로 사는 비결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충분히 늙어 있다
영원이 시간으로 들어오는 방법
우연과 필연은 순간의 차이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말하는 것
생명을 살리는 위협
신념이 태만에서 나온 것일 수도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최선이라는 폭력
악마가 오히려 도덕적이다
약점이 오히려 위대하게 만든다
뻔한 것을 새롭게 보는 힘
놓아주는 것이 오히려 해결하는 길
‘다르지 않다’에서 ‘곧바로 같다’로
산산수수山山水水를 풀면
지식이 멈추는 곳에서 지혜가 시작된다
삶도, 사람도 동사다
삶이 삶의 이유이고 목적이다
‘왜’ 물음이 ‘무엇’과 ‘어떻게’를 추려준다
따로 또 같이
밥과 똥은 한 통 속에 있다
4장 기도의 얼: 간절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몸부림
기도는 종교가 아니라 삶이다
반기독교인이 말하는 진정한 기도
배교 현장에서의 처절한 고백
도덕이나 윤리보다 우선하는 것
기도는 쏟아버리는 배설구이다
오히려 잡념이 활력이 되기도 한다
흥정하고 협박하다가 받아들이기에 이르기까지
신이 침묵하는 이유
기도는 쓸모없음이 지닌 가치에 주목하는 것
하느님이 모든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아서 다행이다
차라리 침묵이 기도가 될 것이다
신의 이름을 쓰지 않는 것이 더 좋다
인간이 되는 것, 신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
신의 아들도 인간이었다
‘침묵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기도가 주술이 아니려면
무신론이 오히려 종교의 참된 요소다
보이지 않는 동행
안과 밖에서 함께 쪼는 것
바꿀 수 없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
믿음과 희망, 사랑 중에 가장 위대한 것
인간, 소망이 소망한 것
종교를 넘어서는 기도
기도는 알 수 없는 삶에서 할 수 없는 말을 하는 것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니
나오며
글로 다 마칠 수 없는 삶을 향하여
참고문헌
일찍이 소크라테스가 델포이 신전에 새겨진 문구에서 따온 “네 자신을 알라”는 격언은 자기 성찰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소크라테스가 다른 현자들과의 대화에서 한 말, “당신들이나 나나 모르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대들은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데 비해 나는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한 것은 자기를 알기 시작하는 지름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 바로 모른다는 것을 알 뿐만 아니라 ‘얼마나 모르는지를 모른다’는 사실이다. ‘모름의 앎’을 넘어 ‘모름의 모름’까지 가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제 파악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물론이고 우리 자신도 우리에게 그렇다. 무엇을 더 알아야만 한다고 안달복달하고만 있을 일은 아니다. 또한 모른다고 안타까워만 할 일도 아니다. 얼마나 모르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_49쪽
니체는 삶의 이유인 ‘왜’를 찾으면 ‘어떻게’는 설령 어렵더라도 견딜 만하다고 이야기한다. 적절한 이유나 근거를 찾는다면 방법 모색은 부차적으로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왜’라는 질문에 대답될 수 있는 이유보다는 그렇지 않은 이유들이 더 많다. 그래서 지식으로 추려내는 방법과 달리 이유는 ‘지혜’를 필요로 한다. 쉽게 그 답을 얻을 수는 없더라도 더듬는 것만으로 뜻을 지니는 ‘이유를 추구하는 지혜’ 말이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과 그 답을 찾는 것은 한편으로 유한한 인간의 지위를 깨닫게 해준다. 그러면서 또한 인간 존재의 근거가 바닥 모를 심연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왜’라는 질문을 통과하면서 얻는 삶의 깊이는 무수한 ‘어떻게’를 견디고 넘어서는 힘을 우리에게 줄 수
있다.
_79쪽
사실 조금 떨어져서 보면 기도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모자라 보이기도 하며 미친 것 같기도 하고 안쓰러워 보이기도 한다. 평상시에는 도저히 하지 못할 것 같은 행동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비상시에는 상황이 사뭇 달라진다. 평상시에 알고 있었던 것이 완전히 뒤집어지거나 부정되고 전혀 다른 삶의 차원이 들이닥치게 된다. 아버지가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매는 위독한 상황에서 아들은 그야말로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누구를 향해서 하는지 알지 못하더라도 더 큰 힘에게 빌고 애원하게 된다. 그런 힘이 있기는 한지, 있다면 이름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모습인지 알지 못해도 크게 상관없는 듯하다. 그저 빌고 비는 것이다. 이래서 인간을 ‘종교적 인간’이라고 한다.
_167쪽
왜 문제를 파헤칠수록 더 꼬이게 되는 걸까? 문제와 해결을 위한 아이디어를 단지 둘 사이의 관계로만 엮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해결책에 집중하다 보면 문제가 온 세상이고 전 우주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떤 문제이든지 세상은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더 크고 복잡다단하다. 따라서 문제와 해법의 아이디어로만 한정시켜서 볼 일이 아니다. ‘즉문즉답’이 간결해 보이지만 먹혀들 수 있는 범위는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그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중요하다. 손을 놓고 있을 때 오히려 해결의 실마리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앎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넓고 깊은 삶의 차원에서 벌어진다. 그것은 실험실의 선반과 같은 앎의 영역과는 사뭇 다르다. 문제 해결을 위해 더 알려고 발버둥치는 과정이 무의미하지는 않겠지만 이는 삶을 앎으로 축소시키는 행위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해결을 위한 아이디어가 제한되거나 아예 나오지 않을 수 있다.
_187~188쪽
기도는 하느님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나우웬은 말한다. 솔직히 우리 자신이 이런 기도를 드려본 적이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어쩌면 많은 종교인들이 기도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면서 결국 실용성의 이념에 사로잡혀왔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해 보인다.
‘그렇다면 기도로 바뀌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반문할 수도 있다. 여전히 실용주의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일 테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불확실성과 마주하는 우리 삶의 마땅한 꼴이다. 확실하다고 규정하는 것이 대부분 거짓인 것은 내가 만든 것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일찍이 키르케고르가 ‘믿음은 객관적 불확실성에 대한 내면적 결단’이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불확실성은 제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무용한 시간을 가치 있게 해주는 삶의 깊이이니 결국 하느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모습이 아닐까 한다.
_28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