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자치통감》을 지금 여기의 입말과 감각에 맞춰 소개하면서도 쉽게 요약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자치통감》이 가진 역사서로서의 의미와 의의를 충실하게 반영해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막 《자치통감》에 입문해 원전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좋은 발판이 되어준다.
해제 《자치통감》 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_권중달
들어가는 글
| 제1강 | 삼가분진三家分晉 세 가문이 진晉나라를 나누다!
지백의 패망/위나라의 굴기/오기의 비극
| 제2강 | 상앙변법商?變法 중국의 정치를 결정한 변법
위나라에서 거부당한 뒤 진나라로 가다/신뢰를 쌓아 변법을 추진하다/상앙의 죽음
| 제3강 | 종횡패합縱橫?闔 합종책과 연횡책을 통한 연합과 분열
남쪽의 파촉을 취하다/먼 나라와 친교해 가까운 나라를 공격한다/외국 인재 추방 소동/적국의 인재를 무너뜨리다
| 제4강 | 천고일제千古一帝 천년에 한 번 나옴 직한 제왕
진귀한 물건은 미리 사 놓아라/조희의 처지/모초의 간언/진시황의 공과 한계
| 제5강 | 망진필초亡秦必楚 진나라를 무너뜨릴 나라는 반드시 초나라일 것이다!
한고조, 세력을 만들다/유방, 관중에 입성하다/홍문에서의 연회
| 제6강 | 초한지쟁楚漢之爭 지도력의 차이가 가른 승패
한왕, 장수를 임명하다/진평이 계책을 올리다/그 사람 한신/해하의 포위
| 제7강 | 서한개국西漢開國 서한의 건국
한나라가 진나라의 제도를 계승하다/토사구팽/공신에 대한 논공행상/여씨 가문의 난/문경의 치
| 제8강 | 한무대제漢武大帝 왕도와 패도의 조화
금으로 만든 집에 미인을 감추다/한무제가 선택한 사상/한무제의 공과 실/무고의 화
| 제9강 | 소선중흥昭宣中興 한소제와 한선제 시기의 중흥
곽광의 정치 보좌/한선제의 즉위/ 곽광의 죽음/참승, 재난의 시작
| 제10강 | 왕망시말王莽始末 왕망의 야심찬 시작과 허망한 말로
왕망이 일어나다/만인의 추대를 받아 등극하다/신망 시기의 개혁/왕망의 말로
| 제11강 | 광무중흥光武中興 한나라를 재건한 광무제
어린 시절부터 뜻을 품다/유수표 융중대/유수가 나라를 세우다
| 제12강 | 사풍교격士風矯激 왜곡된 사풍
환관의 전횡/명사를 논하다/당고의 화
| 제13강 | 조조성패曹操成敗 조조의 성공과 실패
임기응변에 능하고 영민했던 조조/난세의 간웅/성패의 관건
| 제14강 | 유비백절劉備百折 백번 꺾여도 굽히지 않은 유비
강호의 명성/곤궁한 상황에서 기회를 얻다/눈부신 소멸
| 제15강 | 손권편패孫權偏覇 강동의 맹주 손권
부전자전의 사나이/인재 등용과 지략의 활용/처세와 용인술
| 제16강 | 조위국운曹魏國運 과거를 반복한 위나라의 운명
조비가 황제를 칭하다/서로 다른 도량/조위의 폐단/위명제가 어린 황태자를 부탁하다/사마씨의 정권 찬탈
| 제17강 | 서진난국西晉亂局 서진西晉의 어지러운 형세
삼국이 진나라로 통일되다/후계자 분쟁/팔왕의 난
| 제18강 | 수당패업隋唐?業 수나라와 당나라의 패업
북조의 정국/양견의 수나라가 북주를 대신해 일어나다/고경을 파면하다/양용을 폐위하고 양광을 세우다/이밀과 이연의 성공과 패배/천하가 당나라의 품에 안기다
| 제19강 | 치세명군 治世明君 나라를 다스리는 현명한 군주
문과 무로 다스리는 이치/나라를 다스림에 인재를 활용하다/자기 자신을 통제해 간언을 받아들이다/《제범》 , 당태종이 스스로를 통제하다
| 제20강 | 개천치란開天治亂 하늘을 열고 난세를 평정하다
당현종은 누구인가/개원의 치/태평성세의 위기/황제는 낭만주의자/태평성세의 종말
나가는 글
옮긴이의 글 “재才가 덕德을 넘어서는 안 된다!” _오수현
한번은 위문후가 연회를 열고 음악을 감상하자며 전자방을 초청했다. 그런데 한참 음악을 듣던 위문후가 음률이 맞지 않는다며 악사들을 타박했다. “종소리가 고르지 않구나. 왼쪽이 높다.”
편종의 좌우 소리가 고르지 않고 왼쪽이 조금 높게 들린 모양이다. 그 순간 전자방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미소만 지었다. 의아하게 여긴 위문후가 물었다. “그대가 웃는 것은 내 말이 옳지 않기 때문이오?”
전자방이 아뢰었다. “군주는 악관을 살피는 데 밝아야지 소리에 밝을 필요는 없다고 들었습니다.”
다시 말해 군주란 음악을 담당하는 악관이 제 소임을 다하는지를 살펴야지 악관이 해야 할 구체적인 업무까지 간섭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_〈세 가문이 진晉나라를 나누다!〉 중에서
이사는 〈간축객서〉 에서 진목공秦穆公 이래 진나라가 객경을 중용한 뒤 얻은 성과를 무척 설득력 있는 어조를 통해 시대별로 나열했다. 특히 진효공 이래 상앙과 장의, 범수 등이 진나라 왕을 보좌해서 변법으로 부국강병을 도모했던 역사적 경험을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옳고 그름을 묻지도 않고 굽고 곧음을 논하지도 않은 채 단지 진나라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내쫓고 외지에서 온 관리라며 몰아내는 것은 적국으로 인재를 가져다 바치는 일’ 이라고 역설했다. 이들 객경을 도리어 적국으로 돌려보내는 셈이니 진나라에 결코 유익할 수 없다는 말이다. 영정왕은 이 〈간축객서〉 를 읽은 뒤 큰 깨달음을 얻어 이사를 불러서는 축객령을 취소하게 했다.
_〈합종책과 연횡책을 통한 연합과 분열〉 중에서
도처에 비를 세워 진시황 영정이 순행했다는 사실과 통치자임을 강조하는 글씨를 새겼지만 형식적인 기념물이었다. 진심으로 민심을 돌아오게 하려면 정신적인 사상을 전파해 마음을 변화시키는, 소위 유교의 말처럼 ‘교화’ 해야 한다. 이 방면에서 진나라 조정은 진전을 보이기는커녕 천하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다스리려 들었다. 이른바 ‘공격과 수비, 즉 천하를 공격해 얻을 때와 취한 천하를 다스릴 때는 형세를 달리해야 한다’는 이치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진나라 조정의 토지 개혁은 ‘사검수자실전使黔首自實田’ 의 방식이었는데 ‘백성이 자신이 보유한 실제 전답을 신고하고 그에 해당하는 세금만 내면 토지 소유권을 인정’ 해 주는 토지 사유제로 전국시대 ‘수전제受田制’ 의 연속선상에서 출현한 제도다. 그러나 진나라는 부역이 빈번하고 과중할 뿐 아니라 법률이 가혹하니 정책이 실제 삶에서 운용되는 면에서는 민심을 얻을 수가 없었다.
_〈천 년에 한 번 나옴 직한 제왕〉 중에서
유방은 지도력의 핵심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지도자란 앞에서 방향을 결정하는 역할이지, 구체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역할은 아니다. 지도자는 판단하고 실행하는 존재가 아니라 일을 맡기고 그 결과에 대해 평가하는 존재다. 따라서 지도에게 요구되는 것은 권력이지 능력이 아니다.
_〈진나라를 무너뜨릴 나라는 반드시 초나라일 것이다〉 중에서
진평은 시국을 정확히 간파하고 상황에 따라 몸을 굽힐 줄 알았는데 어떤 이는 이를 가리켜 부끄러움을 모른다고 폄하하기도 했다. 하지만 진평이야말로 그 같은 처세법으로 유씨 황실의 종묘사직을 보존했으므로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시류를 알고 융통성 있게 대처하는 뛰어난 인물’ 이 아닐 수 없다. 진평의 지혜와 주발의 능력을 유방 또한 생전에 이미 간파했기에 임종 직전 여후에게 그 둘을 승상 감으로 추천했다. 상황은 유방이 헤아린 대로 흘러가 훗날 진평과 주발은 힘을 합쳐 한나라 제국을 공고히 다지는 데 일조한다.
_〈서한의 개국〉 중에서
유가를 따르는 왕도정치는 다소 진부하고 고지식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한원제에서 왕망에 이르는 시기에는 정치가 실제와 부합하지 않았고 왕망의 개혁은 현실과 동떨어졌다. 따라서 정치의 실용적인 효용성을 기대한다면 패도와 왕도를 적절히 조화해야 했다. 역대 왕조에서 현명하다는 군주들은 제도를 구축하고 규범화하는 데 능했고 유가에서 말하는 큰 이치도 중시해 민생에 관심을 가질 줄 알았다.
_〈왕망의 야심찬 시작과 허망한 말로〉 중에서
왕랑의 한단 궁정에서는 수많은 서신이 발견됐다. 하나같이 유수 수하의 장병들이 왕랑과 내통하며 충성을 맹세한 서신이었다. 만에 하나 유수가 패배할지도 모르는 상황을 대비해서 살아나갈 퇴로를 미리 준비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유수는 이들(배신자들)을 어찌 처리했을까?
그는 장병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서신들을 읽어 보지도 않은 채 마당에 쌓아 두고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모조리 불살라 버렸다. “이 서신들은 우리가 서로 다투어 흩어지게끔 이간질하기 위해 적이 위조한 것이다!”
_〈한나라를 재건한 광무제〉 중에서
손권은 대외 전략을 수립하는 데 탁월했고 시국과 정세를 잘 파악했다. 삼국의 뒤얽힌 외교 전략을 살펴보면 동오가 사용했던 수단이 가장 유연했다. 유비와 연합해 조조에 대항한다거나 위나라에 항복해 유비를 공격했던 것이 사례인데 이는 개인의 감정이 아닌 나라 전체의 이익을 고려한 결과였다.
적벽대전을 치르기 이전은 말할 것도 없고 이후에도 손권은 여러 차례 조조와 승부를 겨뤘고 조금이라도 나라의 이익에 해가 된다면 낯빛을 바꾸어 유비와 반목하기도 꺼리지 않았다. 손권은 여러 차례 조조의 위魏나라에 투항하기도 하고 또 그만큼 여러 차례 촉한과 연합의 맹세를 하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은 순전히 나라의 이익을 우선시한 결과였다.
_〈강동의 맹주 손권〉 중에서
“짐(당 태종)은 어려서부터 활과 화살을 좋아해 스스로 능히 그 오묘함에 통달했다고 생각했다. 근래에 좋은 궁 십여 개를 얻었기에 활 다루는 자에게 보였더니 그가 말하길 ‘모두 좋은 재료가 아닙니다’라고 했다. 짐이 그 연유를 물으니 ‘나무의 중심이 바르지 않으면 나뭇결도 곧지 못하는데 그런 활은 비록 단단하더라도 화살이 곧게 나가지 않아 좋은 활이라 할 수 없는 법이지요’ 라고 했다.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도다. 짐은 사방을 평정하는 데 활과 화살을 쓴 일이 많았으나 오히려 그 이치를 터득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물며 당금에 천하를 소유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마당에 다스림의 이치를 터득함이 활 쏘는 것에도 미치지 못하는구나. 활조차 아직 이치를 다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다스림에 있어서랴!”
_〈나라를 다스리는 현명한 군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