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간에 진실을 교묘하게 감춘 조선왕조실록을 토대로, 정몽주가 살해당한 그날의 미스터리에서 출발해 조선 건국기에 얽힌 거대한 거짓을 집요하게 추적한 결과다. 방대한 당대 사료들을 대조해가며 사관들이 글줄이 아닌 글줄과 글줄 사이, 행간에 은밀하게 숨겨둔 사실들을 발굴한 저자는 한 가지 중요한 역사적 지점에 도달한다. 바로 1398년 1차 왕자의 난이다.
1차 왕자의 난, 또는 무인정사는 1398년 이방원을 중심으로 한 왕자들이 경복궁을 기습해 막냇동생인 이방석을 세자에서 폐하고 왕위를 찬탈한 쿠데타로 알려져 있다. 저자는 한 왕조의 개조가 치맛바람에 홀려 자격이 없는 왕자를 선택했기 때문에 모든 참사가 벌어졌다는 해석보다 조금 더 합리적인 배경이 있을 것이라 주장하며 가설을 제시하고, 외로운 한 인간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내렸던 비정한 선택들, 속을 감추고 감내했던 긴 시간들, 감당해야 했던 무거운 피의 무게, 끝까지 감춰야 했던 역사적 진실들에 대해 추적해간다.
들어가는 글
1부 정몽주 암살사건의 재구성
1장·실록은 진실만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공민왕, 고려의 부활을 꿈꾼 개혁가 | 신돈, 새로운 세상을 바란 개혁가 | 개혁가들의 시간, 고려의 마지막 기회 | 우왕은 신돈의 자식이 아니다 | “짐은 그 아이를 조카로 인정할 수 없네!” | “정종조차 공정왕으로 폄훼되었으니!”
2장·고려는 그렇게 멸망하지 않았다
새로운 역사의 새로운 등장인물들 | 지키려는 자와 뺏으려는 자 | 이성계는 명을 공격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다 | 역사적인 사기꾼들 | 위대한 군주의 미심쩍은 출발 | “그럼에도 누군가는 고려를 지켜야 합니다!”
3장·이방원은 정몽주를 죽이지 않았다
정몽주, 고려의 마지막 희망 | 정도전 대 정몽주 | 마침내, 정몽주와 고려의 반격 | 정도전의 치명적인 실수 | 정몽주에게 주어진 최후의 기회 | “정몽주를 죽여라!” | 1392년 4월 4일, 그날의 진실 | 누가 정몽주를 살해했는가? | 이방원이 감추고 실록이 드러낸 그날의 범인 | 정몽주 암살작전에 이방원은 없었다 | 진실을 행간에 은밀히 감춘 실록
2부 왕자의 난, 반역의 재구성
1장·종말과 시작은 이렇게 교차되었다
새로운 국가의 시작 | 정도전, 조선을 설계하다 | 옛 세상의 시체를 밟아야 새 세상이
보이는가? | 이 땅에 왕씨가 더 이상 없게 하라
2장·반역은 그렇게 예정되었다
시작부터 어긋난 오백 년의 역사 | 실록 밖에서 찾은 진실 | “저희가 적폐란 말입니까” | 이방석이야말로 새로운 왕에 어울렸다 | 사대, 비열한 역사의 시작 | “조선의 사신은 오지 못하게 하라!” | 무시받을 수밖에 없었던 조선 | 드디어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 이방원 | 영락제는 이방원을 후대하지 않았다 | 정도전의 위험한 개혁 | 이방원을 만든 사람들 | 주원장의 계산된 몽니 | 정도전을 요구하는 주원장
3장·반역의 주인공은 이방원이 아니다
절대로 성공할 수 없었던 반역 | 허위로 그득한 그날의 실록 | 경복궁은 왜 쉽게 붕괴
되었을까? | 바로 곁에 있었던 그날의 증거 | 조영무, 다음 왕을 결정하다 | 이방원을 저지할 세력은 없었을까? | 역사 앞으로 나선 이방원 | 뜻밖에 이뤄진 필연, 왕자의 난 | 이성계의 진정한 후계자 | 이방원의 나라 | 이방원이 감춘 역사의 진실
3부 함흥차사 살인사건, 반란의 재구성
1장·이성계는 함흥차사를 죽이지 않았다
함흥차사는 없다 | 아들에게 겨눈 아비의 칼
2장·조사의의 난은 없었다
이성계는 왜 실패했는가? | 조선의 미래에 도움이 된 반란3
3장·그들은 떠나고 조선만이 남았다
피가 깊은 나무, 조선 | 위대한 오백 년의 설계자, 태종
나가는 글
이방원의 고백(본문 요약)
이방원은 정종을 조선의 왕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비록 명의 제후국이었어도 자체적으로 정통성을 확보한 조선은 왕이 죽은 다음 업적에 따라 조와 종의 묘호를 사용했음에도, 이방원은 명에서 내린 시호인 공정왕으로 기록하게 했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恭讓王의 의미가 ‘공손하게 양보했다’는 의미인 것을 감안하면 이방과의 머리
에 씌워진 공정왕은 ‘공손하고 고분고분했다’는 의미 이상은 되지 않는다. 고려의 왕에 훨씬 가까운 이방과가 정식으로 정종의 묘호를 받은 것은 죽은 다음 281년이나 지난 숙종 7년(1681)이었다. 조선의 왕조차 그렇게 수모를 당하는 판에 공민왕은 오죽하겠는가. _정종조차 폄훼되었으니! 중에서
실록에는 ‘목자木子(이씨李氏)가 나라를 얻는다’는 동요가 퍼지는 등 이성계의 반역을 암시하지만, 이성계가 그런 기미를 보였다가는 최영이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다. 얼굴만 비치고 철수하면 될 정도로 단기적이고 과시적인 전쟁에서 최강 이성계를 보낸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정이거니와, 이성계의 배후에 있는 정도전을 경계하지 않은
것이 패착이라고 해야 타당하다. 쉽게 말해 최영은 사기를 당한 셈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기는 믿었던 사람에게 당하기 마련이다. _역사적인 사기꾼들 중에서
이방원이 일족의 피신을 주도했다는 주장을 펴는 것에 대한 근거는 ‘다른 아들들이 이성계를 따라 참전했기 때문’에 있다. ‘그에 따라 이방원이 혼자서 가족들을 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주장은 이방우의 존재로 간단히 퇴치된다. 이성계가 장남으로 하여금 관직을 받고 개성에서 살게끔 조치한 것은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장차 가족
들을 건사하기 위함이다. 그런 장남을 전쟁터로 대동한다는 것 자체가 상식적이지 않거니와, 둘째아들 이방과가 어렸을 때부터 부친을 따라다니면서 군사적인 후계를 담당한 상태였다. 게다가 전쟁 상황으로 현직의 관리들은 더더욱 자리를 지켜야 했기 때문에 어떻게 접근해도 이방우 역시 개성에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또한 당시의 반역이 정도전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방원의 비중은 더욱 희박하다. _위대한 군주의 미심쩍은 출발 중에서
대대로 동북면의 함주를 근거지로 하던 이성계가 서북면으로 출격하자 여진족의 실력자 삼선과 삼개 형제가 크게 쳐들어온 사건이 있었다. 그로 인해 가문의 근거지 함주는 물론 화주 일대까지 침범당해 매우 위태로웠을 때 이성계가 급히 돌아와 평정했다. 고려 말기에는 드물지 않은 사건이었지만, 문제는 삼선과 삼개의 어머니가 이성계의 고모라는 점이다. _이방석이야말로 새로운 왕에 어울렸다 중에서
"정몽주가 성헌을 사주해 번갈아 글을 올려 조준, 정도전 등을 목 베기를 청하니, 태조가 아들 이방과와 아우 이화, 사위인 이제와 휘하의 황희석, 조규 등을 보내어 대궐에 나아가서 아뢰기를 …" 당일의 실록에 이방과가 분명히 나타나거니와 이성계가 부상을 이유로 요양하는 주변에서 이미 논의에 들어간 상태였다. 정몽주가 정도전과 조준, 남은을 위시한 이성계의 심복들을 유배한 다음 죽이라고 주청한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암묵적으로 유지되었던 법칙에 구애될 이유가 사라진 것을 의미한다. 그동안 충분히 기다렸음에도 정몽주가 기권하기는커녕 먼저 움직인 이상 대응에 나서는 방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만큼, 논의를 길게 끌 이유가 없었으며 실행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장이라도 칼을 쓰고 싶었던 것을 계속 인내한 끝에 정몽주에 의해 제공된 빌미는 신속하게 사용되어야 했을 터, 실록에 나타난 것처럼 급박하고 긴박하게 진행될 이유 자체가 없다. _ 이방원이 감추고 실록이 드러낸 그날의 범인 중에서
모든 정보와 가능성을 대입해 빠르게 계산한 조영무는 이방원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 조영무의 긴급한 연락과 함께 정도전이 있는 곳을 전달받은 이방원은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게다가 이방원에게는 운도 따랐다. 당일 실록에는 이숙번이 이방원의 자택에 바로 인접한 신극례의 집에 유숙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언뜻 그럴싸할지 모르겠지만
이숙번은 반역에 동참하기 위해 미리부터 대기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신극례의 집에 유숙’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원래대로 따지면 이숙번이 있어야 할 곳은 신극례의 집이 아니라 정릉에 설치된 군막이다. (중략) 이방원과 함께 직접 정도전을 죽였던 이숙번은 물론 처남 민무구와 민무질 형제들도 차등이었는데, 당일 실록에 단 한 차례 이름만 올렸으며 정치적 안배도 필요치 않았던 조영무의 공이 그렇게 높았다는 말인가?_ 조영무, 다음 왕을 결정하다 중에서
태종 이방원은 단호하게 경원을 부활할 것을 명령했다. 태종의 명령에 의해 조선군이 성을 쌓고 방어력을 강화하는 것을 유심히 관찰하던 장신이 부대를 이끌고 철수했지만, 만일 그때 단호하게 대처하지 않았다면 상황이 어떻게 발전했을지 모를 일이다. 두만강에 바짝 근접한 명의 새로운 위가 텅 빈 경원을 영향권에 두고 여진족과 교전하게 되면 더 이상 조선의 영토일 수 없게 된다. 이후 경원을 손에 넣은 명이 주변을 잠식하게 되면 새로운 쌍성총관부가 등장하는 것은 시간이 문제일 따름이다. 당시 태종의 대처는 지극히 현명하고 효과적이었다. 그때의 대처가 나중에 북방육진을 개척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던 데다, 태종 자신이 서북사군의 개척에 나섰으니 오늘의 국경선을 확정지을 수 있게 했다. 조선을 통틀어 종주국 명에게 그런 방식으로 대처한 왕은 오직 이방원이 유일하다. _위대한 오백 년의 설계자, 태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