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머리에 왜 ‘자연철학’인가?
여는 글 《성학십도》와 〈심우십도〉
퇴계의 《성학십도》|퇴계의 학문편력|《성학십도》의 성격|곽암의 〈심우십도〉
제1장 소를 찾아 나서다: 앎의 바탕 구도
[역사 지평] 근대 학문의 싹 《우주요괄첩》|여헌의 생애|《우주설》과 〈답동문〉|성역 없는 학문 세계|내 안에 있는 이로 천지만물의 이를 비추다|대지는 왜 떨어지지 않는가? [내용 정리] [해설 및 성찰]
제2장 소의 자취를 보다: 고전역학
[역사 지평] 데카르트의 ‘놀라운 학문’|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데카르트가 토대를 세운 물리학|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거인|기적의 해 1666년|사과는 왜 떨어지나? [내용 정리] [해설 및 성찰]
제3장 소를 보다: 상대성이론
[역사 지평] 두 번째 기적의 해|아인슈타인의 지성은 어디서 왔나?|4차원 세계의 선포|또 한 번의 도약 [내용 정리] 두 사다리의 상대적 기울기|상대속도로 본 4차원 시공간의 의미|아인슈타인의 두 기본 명제들|시간 간격의 상대성과 고유시간|4차원 속도와 4차원 운동량|4차원 상태와 상태 변화의 원리|일반상대성이론 [해설 및 성찰]
제4장 소를 얻다: 양자역학
[역사 지평] 취리히 대학의 한 세미나실|“그는 거대한 장막의 한쪽 귀퉁이를 들어 올렸습니다”|파동함수가 의미하는 것은? [내용 정리] ‘상태’의 함수적 성격과 맞-공간|양자역학의 기본 공리|상태 변화의 원리, 슈뢰딩거 방정식|사건의 유발 및 측정의 문제 [해설 및 성찰] 이중 슬릿 실험|‘상호작용-결여’ 측정
제5장 소를 길들이다: 통계역학
[역사 지평] [내용 정리] 거시 상태와 미시상태|엔트로피와 열역학 제2법칙|온도의 의미와 그 활용|자유에너지와 ‘변화의 원리’ [해설 및 성찰]
제6장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다: 우주와 물질
[역사 지평] [내용 정리] 아인슈타인의 우주방정식|우주의 물질 생성과 그 변화|은하와 별의 형성 [해설 및 성찰] 물고기 우화|우주를 이해한다는 것
제7장 집에 도착해 소를 잊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역사 지평]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슈뢰딩거의 책에 담긴 내용 [내용 정리] [해설 및 성찰] 생명의 놀라움과 ‘온생명’의 발견|온생명의 개념 정립|생명의 자족적 단위
제8장 사람도 소도 모두 잊다: 주체와 객체
[역사 지평] 스피노자를 찾아서|스피노자의 출생과 성장|스피노자의 파문|가상의 시나리오|데카르트의 《성찰》|데카르트와 엘리자베스 공주의 문답|스치노자의 대안 [내용 정리] 객체적 양상과 주체적 양상|집합적 주체의 형성|온생명도 의식의 주체인가?|삶이란 무엇인가? [해설 및 성찰] 자유의지에 대한 크릭의 견해|슈뢰딩거의 의식론|의식은 오직 하나인가?
제9장 본원으로 돌아가다: 앎이란 무엇인가?
[역사 지평] 아인슈타인의 권고|세계의 신비는 이것이 이해된다는 것이다 [내용 정리] 주체가 지닌 조직의 구성과 기능|의식적 앎과 비의식적 앎|앎의 대상과 이에 대한 앎의 서술|예측적 앎 작동의 단위 과정|지식과 정보는 어떻게 얻어지는가?|전형적 앎의 몇 가지 사례|보편이론으로서의 동역학동역학의 구조에 대한 메타이론적 성찰|앎의 집학적 주체|끊임없이 네 앎을 죽여라. 그렇지 않으면 네 앎의 너를 죽일 것이다 [해설 및 성찰]
제10장 저잣거리에 들어가 손을 드리우다: 온전한 앎
[역사 지평] 주돈이의 〈태극도설〉|[내용 정리] 무극이면서 태극이다|태극이 나뉘어 음양이 되고 또 변화를 일으켜 오행이 된다|사람의 정신 안에 앎이 생겨나고…|성인이 사람의 바른 자리를 세운다|군자는 이를 지켜 길하고 소인은 이를 어겨 흉하다|시초를 찾아보고 종말로 돌아오니 삶과 죽음의 이치를 알게 된다|상세한 앎과 온전한 앎|온전한 앎의 뫼비우스의 띠 모형|온전한 앎의 한 모습|온전한 앎이 보여주는 것 [해설 및 성찰]
부록 제3장 보충 설명 상대론적 전자기이론
제4장 보충 설명 δ?함수와 푸리에 변환
제5장 보충 설명 햇빛이 가져오는 자유에너지
제6장 보충 설명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우주론으로
권말 부록 간결한 수학 해설|수학 기호와 부호|그리스 문자와 발음
참고 문헌
도서 소개
고전역학에서 마음에 대한 탐구까지…
인간이 앎의 지평을 넓혀간 과정을
열 가지 결정적 장면으로 엮어낸 ‘모든 지혜의 역사’
왜 자연철학인가?
철학에서 과학이 나뉘기 이전부터 시작해 다시 철학과 과학이 만나기까지,
열 가지 전환점으로 보는 인간이 사유한 앎의 여정
이 책에서 저자는 근대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스스로를 스승으로 삼아 자신만의 세계를 완성시킨 이들과 그들의 학문을 《심학십도》의 형식으로 정리해 지성사의 흐름을 조망한다. 구체적으로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는 여헌 장현광부터 뉴턴, 데카르트, 스피노자, 볼츠만, 아인슈타인, 슈뢰딩거 등 인물 중심으로 인간이 학문을 발전시켜간 길과 저자가 평생을 탐구해온 연구 주제들을 포갬으로써 인류가 어떻게 앎의 지평을 넓혀갔고, 동시에 그들의 어깨에 올라탄 저자 자신이 어떻게 공부를 심화시켜갔으며 지금에 이르러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를 아울러 정리했다.
그 과정은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진행된다. 첫째, 형식적으로는 자연과학과 철학이 분리되기 직전 자연철학으로 불리던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간 다음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을 지나 생명을 다시 정의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류 지혜의 역사를 〈심우십도〉에 빗댄다(*곽암의 〈심우십도〉는 한 개인이 진짜 자신, 또는 진리를 찾아나가는 과정을 소년이 소를 찾아 집으로 돌아가기까지의 열 가지 장면으로 그린 우화다).
둘째, 내용적으로는 이론물리학에서 시작해 ‘앎’과 ‘생명’이라는 탐구 주제를 평생 붙든 끝에 철학적 성찰에 도달하게 된 스스로의 연구 인생과 그 성과를 앞서 이야기한 인류 지성사에 포갠다. 즉 근대 이전 자연철학에서 시작해 세분화된 오늘날 분과 학문들의 갈래를 역사상 인류가 그랬듯이 단계별로 차근차근 섭렵한 다음 앎의 큰 줄기를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지금에 이르러 다시 분과 학문으로 갈라지기 전인 통합 학문으로서의 자연철학으로 돌아간다. 인류가 나아가는 지적 여정은 지향과 지양이 끊임없이 교차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책에서 소개되는 지성사의 열 가지 전환점은 독립적으로 분절되는 것이 아니라 인과관계가 성립되는 맥락을 형성하며, 저자 또한 공부의 과정에서 그 맥락을 차근차근 쫓아간 끝에 통합적 앎이라는 새로운 틀을 제시하며 지금까지의 흐름 너머로 나아간다. 이 책의 제목이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인 까닭이다.
여헌 장현광의 《우주설》에서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까지
물리학자가 철학적으로 들려주는 학문의 결정적 순간들이 지닌 의미
“사물은 왜 모두 땅으로 떨어질까요. 그리고 사물이 땅으로 떨어진다면 정작 땅은 어디로 떨어지는 것일까요? 이 구각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무엇과 닮은 것이기에 이 큰 땅을 품고 있는 것일까요? 이 큰 땅을 하늘의 대기가 버텨주고 있다는데 그렇다면 대기는 또 어디에 붙어 있는 것일까요? 혹시 이를 떠받혀줄 기氣라도 있는지요? 혹은 땅을 지탱할 또 다른 땅이 있는지요? _장현광의 〈답동문〉 중에서.
예를 들어 이 책의 첫 번째 챕터 〈소를 찾아나서다〉에서는 여헌 장현광의 저서 《우주설》과 〈답동문〉을 통해 조선에서도 근대 학문이 태동할 뻔했던 지점들을 짚었다.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은 장현광은 1666년 바닥을 굴러다니는 사과를 관찰하던 뉴턴과 같은 질문을 훨씬 먼저 떠올렸다. 즉 ‘모든 사물은 왜 땅으로 떨어지는가? 나아가 그렇다면 땅은 어디로 떨어지는가?’라는 물음을 〈답동문〉에서 제기한 것이다. 물론 장현광은 뉴턴과는 다르게 그 질문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모른다’라는 답을 솔직하게 밝히는 것으로 책을 끝맺는다. 그러나 이와 같이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을 선명하게 구분하는 장현광의 태도는 포항 구석의 한 선비가 근대 학문의 태도를 보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어서 뉴턴과 데카르트가 연 고전역학부터 양자역학, 통계역학 그리고 저자가 탐구해온 생명의 구조 등을 거쳐 마지막으로 열 번째 챕터에서 지금까지 훑어 내려간 인류 지성사를 주돈이의 〈태극도설〉의 구도와 비교해 논의함으로써 삶 중심으로 형성된 동아시아의 학문 전통이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지를 살피고자 했다.
나아가 저자는 이러한 인류의 지혜가 도약한 열 번의 결정적 장면과 자신이 걸어간 독보적인 공부의 경지를 합쳐 퇴계 이황이 작성한 《성학십도》를 변주한 ‘심학 10도’라는 표로 간단하게 도식화했다.
셋째, 구조적으로는 지성의 변곡점 열 가지를 담은 각각의 챕터들이 모두 세 개의 층위 안에서 전개되도록 구성했다. 즉 첫 번째는 ‘역사 지평’으로, 인류 지성사의 진행 과정 속에서 어떤 계기로 어떤 지적 폭발이 탄생했는지를 에피소드 중심으로 풀어나간 역사적 층위다. 두 번째는 ‘내용 정리’로, 저자가 이러한 역사에서 태어난 새로운 학문들의 핵심을 어떻게 짚어내고 또 정리했는지를 종종 정교한 수식을 곁들여 소개하는 내용적 층위다. 세 번째는 ‘해설 및 성찰’로 지금까지의 내용들을 쉽게 해설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흐름들이 지닌 의미를 보다 깊게 고민하고자 했다.
과학을 모르는 철학자와 철학을 모르는 과학자들의 세상에서
한 노학자가 스스로의 삶으로 이야기하는 ‘진짜 공부’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가 집필된 목적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이른바 ‘전문가 바보’가 생겨난 오늘날 학문 토양에 대한 반성이다. 언젠가부터 공부를 하는 데 있어 앎 그 자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천착한 아주 좁은 분야 외에는 모르는 것이 미덕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를 학자로서의 겸양이나 또는 엄밀함을 추구하는 태도로 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철학자는 자연과학을 몰라도 상관없고, 과학자는 철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전혀 지장 없게 된 것 또한 사실이다. 철학에서 자연과학이 분리된 이후 본의 아니게 ‘앎을 사랑한다’는 의미를 가진 철학이 간직했던 학문 지향이 왜곡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기존 분과 학문들을 연결 짓는 이른바 통섭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지점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근대 이전 자연철학 본류의 지향은 간직하되 오늘날 학문의 대략적인 전모를 담아낼 새로운 틀을 마련하고자 했다. 당연히 쉽지 않은 작업이며 한 개인의 성취로 완성될 수 있는 범위도 아니다. 다만 이 책이 그러한 새로운 앎의 틀에 대한 몸 풀기, 맛보기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앎’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는가?
새로운 틀에 담아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앎의 지평
또 하나는 한국의 당대 지성이 ‘온전한 앎이란 무엇인가’라는 거대한 질문을 붙들어온 평생의 연구 과정을 중간 정리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폴 고갱의 작품 제목이기도 한 ‘우리는 어디서 왔고,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은 인간이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붙잡고 있는 대표적인 철학적 화두다. 따라서 무수한 책에서 다뤄오면서 더러는 조심스럽게 결론을 짓고 더러는 답을 유보한 채 더 큰 질문으로 나아갔다. 물리학에 바탕을 둔 이 책 또한 이러한 철학적 질문으로 회귀하지만 그 과정이 지금까지 시도되었던 것들과는 사뭇 다르다. 이론물리학의 바탕에서 복잡한 수식과 정교한 사유의 틀을 활용해 자연과학적으로 풀어나가고자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찍이 인간의 자아를 양자역학적 파동함수로 규명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는데, 저자는 이러한 가설을 그저 철학적 흥밋거리로만 보지 않고 진지하게 그 가능성을 수학적으로 검토한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는 단순히 한 노학자가 그간의 업적을 책 한 권으로 그러모아 서랍식으로 정리하는 데 그친 결과가 아니다. 저자는 2003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한 이후에도 연구 활동을 꾸준하게 지속해 더욱 깊은 경지로 사유와 고민을 진전시켜갔다. 이 책에서는 그러한 성과들을 모두 담았다. 예를 들어 그간 저자가 꾸준하게 이야기해온 ‘온생명’과 ‘낱생명’을 대중적으로 풀어 다른 연구들과 연결 짓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생명의 정의를 내릴 때 자유 에너지가 태양으로부터 지구로 직접 쏟아진다는 과거의 주장을 입증해 2018년 《Physica A》에 등재되기까지 한 최근 논문의 성과까지 반영하고자 했다.
따라서 이 책은 철학에서 분리된 자연과학이 다시 철학을 들여다보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지혜의 역사책이자, 온전한 앎을 추구하며 철학적 질문들을 자연과학적으로 규명하고자 한 과학 저술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여든이 넘도록 평생 공부를 지향해온 저자 자신이 오직 공부로서 스스로를 이야기한 ‘개인’이 드러나지 않은 공부 자서전이다.
목차
책 속으로
“과학자는 철학을 모르고, 철학자는 과학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상식으로 통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과학’을 ‘성공한 철학’이라고 놓고 이 문장을 다시 읽어보자. “‘성공한 철학자’는 철학을 모르고, 철학자는 ‘성공한 철학’을 모른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이 된다. 서양에서는 ‘앎을 사랑한다는 뜻’으로 ‘철학’이라 했고, 동양에서는 그저 ‘학學’이라고 불렀을 뿐 부분으로 갈라놓지 않았다. 그런데 ‘철학’ 또는 ‘학’이 다른 이유도 아닌 ‘학문 자체의 성공’으로 인해 이리 찢기고 저리 찢겨 그 본연의 모습을 잃고 있는 것이다. _책 머리에 중에서
제1장 《우주설》에 나타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근대 서구 과학이 그 내용을 어떻게 채워왔는가를 알아본 후 다시 제10장에서 이 모두를 〈태극도설〉의 구도와 비교해 논의함으로써 ‘삶 중심’으로 형성된 동아시아의 학문 전통이 어떻게 이어질 수 있을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근본적으로 우리 문화의 풍토에 바탕을 놓고 그간 서구 과학이 얻어낸 내용들을 우리의 관념 틀 속에서 파악해 결국은 우리의 지적 자산으로 삼아보자는 자세다. _여는 글 중에서
“사물은 왜 모두 땅으로 떨어질까요. 그리고 사물이 땅으로 떨어진다면 정작 땅은 어디로 떨어지는 것일까요? 이 구각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무엇과 닮은 것이기에 이 큰 땅을 품고 있는 것일까요? 이 큰 땅을 하늘의 대기가 버텨주고 있다는데 그렇다면 대기는 또 어디에 붙어 있는 것일까요? 혹시 이를 떠받혀줄 기라도 있는지요? 혹은 땅을 지탱할 또 다른 땅이 있는지요? _ 제1장 소를 찾아나서다 중에서.
뉴턴과 아인슈타인 사이에 우연의 일치라기에는 기묘한 공통점 하나를 본다. 이유는 좀 다르지만 두 사람 다 16세에 제도권 교육에서 벗어난다는 점이다. (중략) 이 소중한 지적 성장기에 혼자의 힘으로 학문에 도전해본다는 것은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려는 사람들에게 어쩌면 필수적 경험이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을 준다. _제3장 소를 보다 중에서
아인슈타인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양자역학이 홀로서기에 충분할 만큼 자연스런 공리체계를 마련하지 못했다는 점이라고 생각된다. (중략) 그러나 자연의 조화가 맞-공간 속에 운동량-에너지를 숨기고 있었음을 찾아낸 이후, 시공간의 4차원 구조를 찾은 것과 같은 감명을 받았고 내 눈을 가렸던 커다란 장애 하나가 사라지는 느낌을 얻었다. 물론 이 새 공리체계가 아인슈타인에게도 공감을 줄 내용인지는 나 자신도 판단할 수 없지만, 앞으로 양자역학을 학습하는 이들에게 문턱을 크게 낮춰 주리라는 점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_제4장 소를 얻다 중에서
생물들처럼 같은 온도 여건에서도 계속 활동(변화)한다는 것은 더 낮은 자유에너지 상태로 계속 전환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외부로부터 대상 계로 별도의 자유에너지가 공급되지 않는 한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 자유에너지는 어디서 오는가? 그리고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 (중략) 최종 결과는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최무영 교수의 도움을 얻어2 018년 3월 1일자로 물리학 학술지 〈Physica A〉에 발표했는데,? 아직까지는 학술지에 기재된 것 이외에 달리 소개된 바가 없기에 그 주요 내용을 추려 <부록> ‘제5장 보충 설명’에 수록했다. _제5장 소를 길들이다 중에서
우주 내의 한 사물에 해당하는 우리가 ‘삶의 주체가 되어 우리의 의지에 따라 삶을 영위해나가게 된다는 것’은 그 나름으로 엄연한 사실이며, 이 둘이 양립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설혹 우리의 의지 자체가 이미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 질서 안에서 형성되는 것이라 해도, 일단 이것을 ‘나’라고 느끼며 나로서 살아가는 한, 나 아닌 다른 무엇일 수는 없다. (중략) 우주 안에 물리적 법칙에 따르지 않는 그 무엇도 없으며 따라서 물질 일원론을 펼칠 수가 있지만,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 주체로 행세하는 입장에서 보면 우주의 일부를 내 의지에 따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놀라운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_제8장 사람도 소도 모두 잊다 중에서
일급 물리학자들조차 포기하거나 비관한 마지막 문제 하나를 생각해보자. 이는 곧 앎이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물음은 그 자체로서 매우 독특하다. 어떤 물음이 추구하는 것은 그 해답에 해당하는 앎을 말하는 것인데, 이 물음은 앎 그 자체가 무엇인가를 다시 묻고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앎의 자기 완결성을 묻고 있는 물음에 해당한다. _제9장 본원으로 돌아가다 중에서
수가 목을 낳는다는 것(수 → 목)은 자연스럽게 식물의 자유에너지 전환 곧 광합성의 과정을 말하며, 목이 화를 낳는다는 것(목 → 화)은 이 자유에너지를 활용한 각종 활동을, 그리고 화가 토를 낳는다는 것(화 → 토)은 바탕질서로의 환원을 의미하며, 다시 토가 금을 낳는다는 것(토 → 금)은 바탕질서로부터 유용한 소재가 분리됨을, 그리고 금이 수를 낳는다는 것(금 → 수)은 이 소재의 원활한 흐름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 또한 현대적 관점에 의한 견강부회일 수 있다. 사실 〈태극도설〉에서는 이를 이러한 특정 과정에 한정하지 않고 모든 존재물 즉 건곤과 만물에 적용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세계 특히 우리 온생명이 기본적으로 이러한 과정들이 여러 겹으로 쌓여 형성된 것임을 감안할 때 이 해석의 적용 범위는 예상 외로 넓을 수 있다. _제10장 저잣거리에 돌아가 손을 드리우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