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하게 펼쳐지는 시댁 수발의 길
“며느리 노릇은 그만하겠습니다”
15년 결혼 생활 내내 무정했던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홀로된 가요코는 크게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현실에 안도하지만, 참한 며느리 역할을 기대하며 점점 옥죄어오는 시집 식구들이 부담스럽다. 사생활을 구속하기 시작한 시어머니와 치매에 걸린 시아버지, 히키코모리 시누이까지 살뜰히 보필하면서 남은 인생을 보내야 하는 걸까? 가요코는 이제 자신이 누구의 아내도 아닌 자유의 몸이라고 생각했던 게 큰 오산이었음을 깨닫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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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슬프지 않은 걸까. 남편이 죽었다는데 어떤 감정도 북받쳐 오르지 않는다. 그뿐인가. 제단에 놓인 영정 사진을 바라보고 있자니 생판 모르는 사람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영정 주위로 수많은 국화가 장식되어 있다. 하얀 꽃과 초록 이파리의 두 색감을 묘하게 살려서 물이 흐르는 것처럼 디자인해놓았다. 흐트러짐도 없고 꽃의 크기까지 가지런해서 꼭 플라스틱으로 만든 조화처럼 보였다. 생화인데도 한 송이 한 송이 서로 다른 개성은 여기서는 인정되지 않는다. 마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_ 7쪽
나와 시라카와는 사오리의 등 뒤에 정좌하고 앉았다. 사오리의 호리호리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묵념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길다. 길어도 너무 길다. 도채에 언제까지 저렇게 합장하고 있을 참인가? 언제까지 저렇게 눈을 감고 있을 예정인가? 긴 속눈썹이 아름다운 그녀의 옆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한순간 울화가 치밀었다. 불쾌했다. 혹시 이 여자는 지금 남편과 마음속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까?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이렇게 끊이지 않을 만큼 화제가 풍부했다는 말인가. _ 76쪽
나는 설마설마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컴퓨터 앞에 앉아 '시댁과 인연 끊기'라는 검색어를 넣어봤다. 놀랍게도 많은 검색 결과가 펼쳐졌다. 차례로 읽어보니 시부모와 연을 끊고 싶다는 상담 사례가 엄청 많았다. 그에 대한 답변으로는 구청에서 제공하는 '인척관계종료신고서'를 권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안도 씨의 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양식도 실려 있었다. 본인과 남편의 이름을 기재하고 도장만 찍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보증인의 서명이나 인감도 필요 없어서 혼인신고보다 간단하다. 게다가 남편 집안 쪽의 서명조차 필요하지 않아 시부모 모르게 서류를 제출할 수도 있었다. _ 218쪽
“가요코, 진즉부터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 겐타로가 왜 갑자기 죽었지?”
“왜냐니요? ……뇌졸중이었죠. 사망 진단서에도 그렇게 쓰여 있었잖아요.”
“그런 뜻으로 물은 게 아이다카이!”
시어머니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내가 깜짝 놀라 온몸을 움찔했다. 시어머니의 사투리를 처음 들었다.
“그동안 겐타로에게 음식을 잘해 먹였는지 그거를 묻고 있는 거 아이가?”
한껏 눈을 치켜뜬 시어머니의 모습이 절에서 볼 수 있는 사천상처럼 보였다. _2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