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내가 멈췄을 때 돌아볼 수 있는 나의 바탕.
공부의 시작에서 접했지만 살아가며 잊어버렸던 어른다움.
기본으로 돌아간다는 것, 《소학》.
왜 어른들이 단풍 앞에서 오래 머무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만큼 살아온 다음에야 그 까닭을 알게 되었다. 절기의 반환점을 돌아 떨어지는 잎들이 애틋하기 때문이다. 거둘 때에 이르면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보며 남은 길을 가늠하게 된다. 그래서 주변의 모든 것이 새삼스럽고 사무치다. 어른이란 거쳐 온 길만큼 삶의 더께들이 나이테로 내려앉은 존재다. 비바람을 견디면서 경험이 축적되고 만사에 익숙해지면서 특별했던 사건들이 어지간한 일이 된다. 그것을 내공이라고 여겨왔지만, 문득 이런 의심이 든다. 내가 지혜라고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편견은 아니었을까? 세월에 단련되어 단단해진 것이 아니라, 세월에 길들여져 딱딱하게 굳어진 것은 아닐까? 나를 형성한 나이테에 갇혀 그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밟고 있는 곳이 인생의 정점임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성취감보다는 불안감을 느낀다. 익숙해서 습관이 되어버린 일상들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인생의 하강곡선을 그릴 것 같아서다. ‘고인 물’이니 ‘라떼는 말이다’라는 유행어에는 이러한 정체감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다산의 마지막 습관: 기본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내가 굳어지고 텅 비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우울함으로 번질 때 펼쳐보고 기댈 수 있도록 마련한 오래된 조언이다. 《다산의 마지막 공부》와 《천년의 내공》의 저자 조윤제가 다산이 학문의 마지막에서 육십 년 내공을 비우고 새롭게 시작한 공부, 《소학》의 주요 구절 57가지를 가려 뽑아 오늘날의 감각에 맞게 풀었다.
다산이 처음 배운 어른의 기본,
그리고 정점에서 다시 찾은 책 《소학》
“오랫동안 깊이 연구해 하나라도 얻어낸 것이 있으면 기록하고자 했다. 이제 공부를 오롯이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니 《소학》과 《심경》만이 특출하게 빼어났다. 이 두 책에 침잠해 힘써 행하고자 한다. 《소학》으로 외면을 다스리고, 《심경》으로 내면을 다스린다면 현자의 길에 이르리라.” _다산 정약용의 《심경밀험》에서.
《소학小學》은 유학 입문자들을 위한 교재다. 주자의 제자 유자징이 여러 고전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법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자기 수양에 대한 구절들을 가려 뽑았다. 조선 서당에서는 《동몽선습》과 《명심보감》 다음으로 가르쳤다. 사서삼경에 들어가기 전에 입문 단계를 마무리 지으며 기초와 심화를 잇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쉬운 책만은 아니다. 후반부인 외편으로 들어가면 《논어》, 《맹자》, 《회남자》, 《사기》, 《춘추좌전》 등을 인용해 난이도가 만만찮게 상승하기도 한다. 그래서 《소학》을 제대로 익히면 어지간한 명문은 섭렵했다고 여겼다.
다산 정약용 또한 《소학》을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말년에 모든 공부를 비우고 《소학》과 《심경》만을 남겼다. 두 책은 사서삼경에서 좋은 구절을 선별한 결과이며, 사대부들의 필독서였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지향은 정반대다. 《심경》이 유학의 가장 높은 경지에서 마음을 들여다보는 심오한 구절들을 정리했다면 《소학》은 가장 낮은 곳에 뿌리를 내린 다음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수양과 상대방을 대할 때의 몸가짐을 강조한다. 《심경》과 《소학》 각각의 핵심을 합치면 극기와 복례가 된다. 다스린 마음을 몸으로 옮겨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철학은 존재와 인식에서 시작해 논리와 미학을 거쳐 윤리, 즉 실천으로 귀결된다. 다산이 공부의 마지막에서 《소학》을 꺼내든 까닭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공부는 ‘당연한 이치’를 배우는 것에서 시작해 배운 것들을 회의하는 것으로 깊어지며, 살아가며 잊어왔던 처음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이를 일상에서 실천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모험을 마치고 돌아온 집에서 파랑새를 찾았다는 동화처럼 마지막 경지에서 처음과 마주한다는 이야기는 그럴듯하면서도 선뜻 와 닿지 않는다. 그렇게 《소학》이라는 상징을 통해 학문의 흐름을 처음과 끝의 순환으로 정리하기에는 정약용이 자신의 묘지명에 적어내린 고백들이 너무 절절하기 때문이다. 왜 그는 인생의 마지막에서 다시 《소학》을 꺼낸 것일까?
어른답게 성장한다는 것,
다산은 왜 처음을 되돌아봤는가?
“내 나이 예순, 한 갑자를 다시 만난 시간을 견뎠다. 나의 삶은 모두 그르침에 대한 뉘우침으로 지낸 세월이었다. 이제 지난날을 거두어 정리하고,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 이제부터 빈틈없이 나를 닦고 실천하며 내게 주어진 삶을 다시 나아가고자 한다.” _다산 정약용의 《자찬묘지명》에서.
누구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순간이 찾아온다. 귀양살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정약용 또한 그러했다. 그는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추락했고, 세상 모두가 자신에게 등을 돌렸음을 절감했다. 2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유폐되면서 학문은 더욱 깊어졌지만, 그것을 알릴 기회도 끊겼고, 전해줄 제자도 구하지 못했다. 자신의 묘지명마저 스스로 써야 할 처지가 되었을 정도로 그는 완전하게 삶의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정약용은 실망하지 않았다. 후회와 미련으로 가득한 삶을 부정하지 않고 기꺼이 끌어안았고, 평생을 공부에 바쳐 도달한 경지에 안주하지 않고 그 너머로 나아가기 위해 육십 년 동안 쌓은 학문을 기꺼이 내려놓았다. 다시 채우기 위해 한 갑자의 내공을 비운 것이다.
이미 인생의 바닥을 경험한 정약용이 두려워한 바는 다시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정체된 채로 늙어가는 것이었다. 그는 삶이 다 하는 순간까지 자신이 멈추지 않고 계속 성장하기를 바랐기에 환갑에 이르러서 이제부터야말로 공부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정약용이 《심경》과 함께 《소학》을 마지막에 선택한 까닭은 이 때문이다. 그는 죽을 때까지 날마다 새로워지고자 했고, 그러기 위해 매일 저녁마다 죽고 매일 새벽마다 부활하기를 바랐다. 《소학》을 새롭게 풀어낸 이 책에 ‘다산’을 제목에 올린 까닭 또한 여기에 있다. 다산의 삶은 《소학》에서 시작해 《소학》으로 돌아가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소학》에서 이야기하는 공부의 핵심은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살아가며 감히 실행하지 못했던 당연한 이치를 새삼스럽게 하기에, 《소학》은 유학 경전들 가운데 가장 쉽고 동시에 가장 어렵다.
《다산의 마지막 습관》은 이러한 《소학》을 바탕으로 삼아 고전연구가 조윤제가 《다산의 마지막 공부》에 이어 다시 한 번 고전의 깊은 맛을 소개한다. 구체적으로 《소학》 가운데에서도 거듭 새겨들을 명구 57가지를 선별해 핵심을 뽑아 지금의 감각에 맞도록 새롭게 풀었다.
기본으로 돌아간다는 것,
나를 찾기 위해 나를 비우는 마지막 습관
“궁리란 심오한 이치를 깊이 공부하며 만 가지 변화를 두루 섭렵하는 데 이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날마다 일상에서 행하는 평범한 도리를 헤아려 말없이 마음속에서 나누어 살피는 것이다.” _다산 정약용
그동안 걸어왔던 길에 길들여졌다고 느낄 때, 쌓아왔던 내공을 남김없이 쏟아내 고갈되었다고 느낄 때, 우리는 세상의 속도에 뒤처지지 않고자 달음박질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4차 산업혁명’이니 ‘뉴노멀’이니 시기마다 표현만 달라진 구호들에 떠밀려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채우는 데만 급급해지곤 했다.
그러나 《소학》에서는 그런 것이 성장이나 새로움이 아니라고 말한다. 성장이란 도태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고자 노력하는 습득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하기에 살아가면서 잃어버렸던 가르침을 되찾아 하루를 충실히 사는 자세를 몸에 길들이는 습관이고, 그러한 습관을 들이기 위해 지금까지 몸에 배인 모든 습관을 비우고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꼽는 《소학》의 핵심 가운데 대표적인 가르침은 정리와 인사와 같은 시시한 일에 대한 강조다. 《예기》에는 “아침이 되면 몸을 정돈하고 이부자리를 갠 다음 마당에 물을 뿌리고 청소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어찌 보면 시시하고 뻔한 이야기를 은밀한 진리라도 속삭이듯 진지하게 권하기에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매일 행해야 하는 사소한 습관이라는 지점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은 가르침이기도 하다. 《논어》에서 공자는 “일상에서 시작해 심오함에 도달했다(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라고 말했다. 자기 집 쓰레기 분리배출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지구온난화를 걱정하는 태도는 어딘지 공허해 보인다. 하늘에 닿는 높은 사유도 그 시작은 현실이라는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자신이다. 인간이란 이상이 아니라 살아낸 사소한 일상들로 이뤄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증명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완성할 수 없다.
그래서 다산이 환갑에 이르러 《심경》으로 마음공부를 마친 다음 과정은 일상의 소소한 순간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다산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어렸을 때의 가르침을 그제야 삶에 적용했다. 새벽에 일어나면 마당에 비질을 하면서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봤다. 《소학》이 권한 대로 이리 오래전에 내려놓았던 글을 다시 읽으며 복사뼈에 구멍에 세 번 날 정도로 글쓰기에 매진했다. 그리고 누런 콧물을 흘리는 동네 아이부터 이름 없는 촌로에 이르기까지 함께 사는 이웃들에게 예의를 다했다.
자신을 만들어나간 습관들을 모두 비우고 평생 동안 지켜나갈 단 하나의 습관을 새로 들이는 것, 그것이 다산이 매일 새로워지며 평생 성장해나가기 위해 택한 방식이었다.
다산처럼 산다는 것,
무례한 세상에서 어른답게 사는 법
자기 정체성이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된 지금 여기에서는 관계에 대한 고민에서조차 철저하게 나를 기준으로 삼는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나를 갈무리하기보다는 상대방을 내 편으로 물들이려고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보다는 타인을 효과적으로 설득시키는 노하우가 더 많은 호응을 받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덕이란 우리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부단하게 갈고닦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노력한 끝에 도달하고자 지점은 능숙함이 아닌 인간다움이다. 그리고 인간다움이란 더불어 사는 삶이고, 나와 남 모두에게 최선을 다하는 행위의 실천이며 그것을 이끌어내는 격, 어른다움이다. 바로 어린 아이에게 어른다움을 가르쳐주는 《소학》이 추구하는 바와 상통한다.
예의는 자신이 살고 있는 범위에서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합의다. 합의란 상호 간의 타협을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타협이란 내가 받고 싶은 만큼 남을 미루어 짐작하는 감수성을 전제로 한다. 오늘날 자의식이 비대해진 이면에는 폐쇄 사회로의 진입이 도사리고 있다. 공감하고 공감 받는다는 복잡다단한 과정은 일찌감치 포기한 채 적당히 설득하고 설득당하는 척 사는 것, 그것이 사회적 거리두기가 화두가 된 지금 우리의 생존전략이다.
이러한 독백의 범람에 대해 한 가지 우려되는 지점이 있다. 바로 인지상정에 대한 실종이다. 언제부터인가 일상용어로 자리 잡은 사이코패스에 대한 정의를 요약하자면 ‘인간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인간’이다. 그렇게 보자면 2미터의 간격을 두고 살아가는 지금, 누구나 괴물이 될 수 있다. 바로 어렸을 때 배웠던 당연한 가르침을 잊어버린 어른이 될 때다. 이렇게 무례한 세상에서 다산이 마지막까지 들여다본 《소학》, 처음으로 돌아가라는 가르침은 나 또한 딱딱하게 굳어진 사람이 된 것은 아닐까 문득 의심이 드는 이들에게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목차
시작하는 글 다산처럼 산다는 것
입교立敎) 위학일익爲學日益 배움이란 매일 채워도 끝이 없다
공부의 마지막은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나 또한 누군가의 스승이 된다/음악은 아이에게 들려주는 미래다/좋은 생각과 좋은 행동 사이만큼 먼 것이 없다/악마가 물들이기 전에 서둘러 나아가라/일상의 사소한 것들이 모두 나의 스승이다/사람이 되고자 공부하지 말고 먼저 사람이 되어라/예술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인간은 지식이 아닌 태도로 증명된다
명륜明倫) 자승자강自勝者强 예의란 타인이 아닌 스스로를 이겨내는 자세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책상부터 정리하라/가장 가까운 사이부터 진심을 다하라/용기란 삶의 비겁함마저 안아주는 것이다/살아간다는 것은 죽음보다 무겁고 무섭다 /사람은 자신을 존중하는 이에게 목숨마저 바친다 /설득은 자기 자신부터 설득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사람은 누구나 매일 인생의 시험을 치른다 /친구란 같은 위치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 존재다 /말이란 지나온 발자국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좋은 친구를 얻는 방법은 먼저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이다 /좋은 약은 거듭할수록 약효가 바래진다 /친구는 희귀하고 변치 않는 우정은 더욱 희귀하다 /익숙한 사이일수록 예의가 필요하다/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구분해야 어른이 된다
경신敬身) 독립불개獨立不改 흔들리지 않는 마음은 단단한 몸가짐에서 나온다
굳이 가득 채우려고 애쓰지 마라/스스로를 공경해야 자신을 이겨낼 수 있다/몸을 단단히 하고 싶다면 말부터 단단히 단속하라/생각하지 않는 공부는 쓸모없고 공부하지 않는 생각은 위험하다 /배움에 취한 자신에게 홀리지 말고 배움 자체에 취하라/과거에 얽매인 비난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비판을 하라/말은 뜻을 제대로 전달하면 족하다/인간은 뒤돌아볼 때마다 어른이 된다/짐승은 이빨을 드러내며 공부하는 사람을 비웃는다/남들만큼 살기 위해 스스로를 포기하지 말라
계고稽古) 이대사소以大事小 강자는 머리를 숙여 자신의 정수리를 보여준다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한 사람을 정해 그와 나란히 서라/지금 아이가 보는 것이 평생의 기억으로 새겨진다/제자는 자식이 될 수 있어도 자식은 제자가 될 수 없다/가르침은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등으로 보여주는 것이다/누구나 지옥을 걷고 있으니 타인에게 관대하라/가장 빠른 지름길은 지름길을 찾지 않는 것이다/말은 한 사람의 입에서 나와 천 사람의 귀로 들어간다/갈림길 앞에서는 주저하지도, 서두르지도 말라/유산은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찾도록 돕는 것이다
가언嘉言) 붕정만리鵬程萬里 감히 짐작할 수 없는 말의 내공을 갖춘다
어른이라면 아이를 어른으로 이끌어줘야 한다/예술은 지식이 놓친 ‘사람의 마음’을 전해준다/남의 인격을 평가하려면 자신의 인격부터 걸어야 한다/악은 ‘평범함’과 ‘사소함’이라는 가면을 쓴다/마음을 단단하게 지켜내려면 흔들리는 마음을 인정해야 한다/명문가는 백 년에 걸쳐 이뤄지고 하루 만에 무너진다/오늘 고치지 않고 내일이 있다고 하지 말라
선행善行) 일일청한一日淸閑 하루만이라도 다산처럼 살아본다는 것
학문은 아래에서 높은 곳으로 거슬러 흐른다/느리기에 방향이 확실하고 무겁기에 발자국이 깊다/스스로에게 너그럽다면 모두에게 부끄러워진다/세월을 견디고 비바람을 버텨야 나이테가 쌓인다/형제는 또다른 나이니 우애란 말도 새삼스럽다/누구나 누군가의 귀한 아들이고 딸이다/오직 사람만이 마음을 소리로 듣고 부끄러워한다/스스로를 과시하고자 정의와 상식에 기대지 말라
책 속으로
朝益暮習 小心翼翼 一此不懈 是謂學則
조익모습 소심익익 일차불해 시위학칙
다산의 이 말은 외면의 엄정함을 말하고 있다. 내면을 잘 갖췄다면 겉으로 드러날 수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수양은 깊은데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칠어 보인다. 하지만 내면은 잘 갖춰져 있지 않은데 겉만 번드르르한 사람은 스스르의 삶마저 기만하게 된다. 겉과 속이 잘 어우러져야 어른다운 어른이라 할 수 있다. 군자의 모습이 꾸며서 된 것이 아닌 것처럼 다산이 아들들에게 내린 말도 모습을 꾸미라는 가르침이 아니다. 스스로의 삶이 배움이며, 일상이 곧 배움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행하는 모습 자체다. 이루고 싶은 경지가 있다면 하루하루의 충실함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이런 모습이 누적되고 쌓이면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결과를 만들 수 있다. 평범한 일상들이 쌓여 비범해졌을 때, 우리는 ‘위대하다’고 한다.
_〈일상의 사소한 것들이 모두 나의 스승이다〉 중에서
凡內外 鷄初鳴 咸?漱 衣服 斂枕? 灑掃室堂及庭 布席 各從其事
범내외 계초명 함관수 의복 렴침점 쇄소실당급정 포석 각종기사
아침에 일어나 귀찮음을 떨치고 침대를 정리한다. 사소한 일이지만 나는 하루의 시작부터 이겨냈다. 첫 번째에서 이겼다면 두 번째에서도 이길 것이고, 그렇게 이겨낸 경험이 쌓이면 스스로를 이기는 것은 습관이 된다. 사소한 지점부터 차근차근 돌아보며 해법을 찾아나간다면 고난을 이겨낼 가능성이 훨씬 높아진다. 그 시작은 바로 자신의 삶을 단순화하고, 옳지 않은 것은 중단하고, 주어진 일상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공자가 말했듯이 그 어떤 높은 이상도 땅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신은 물론 온 집안이 부도덕한 사람이 사회의 정의를 부르짖는다면 우스꽝스러워 보일 뿐이다. 아무리 높은 이상도 그 시작은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자신이다.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가는 일상이다. 일상에서 증명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인정받을 수 없다.
_〈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책상부터 정리하라〉 중에서
孔子於鄕黨 恂恂如也 似不能言者 其在宗廟朝庭 便便言 唯謹爾 朝 下大夫言 侃侃如也 與上大夫言 誾誾如也
공자어향당 순순여야 사불능언자 기재종묘조정 변변언 유근이 조 하대부언 간간여야 여상대부언 은은여야
우리는 물 흐르듯 거침없이 자신의 의견을 전하는 능력을 부러워하곤 한다. 하지만 잡다한 지식과 전문용어를 남발하며 과시하듯 말하는 것은 진정한 말의 능력이라고 할 수 없다. 굳이 복잡하게 표현하거나 외국어를 섞어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람들에게 공자는 “말이란 뜻을 전달하면 그만이다(사달이이의 辭達而已矣)’라고 가르쳤다. 꾸밈은 있으나 뜻은 사라져버린 말을 안타까워한 것이다. 말해야 할 때 하고, 말하지 않아야 할 때는 자제하고, 숨기는 것 없이 진심으로 말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행동도 마찬가지다. 당당하면서도 나설 때와 나서지 않아야 할 때를 잘 구분해서 행동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지켜야 할 것이 있다. 말이든 행동이든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_〈말은 뜻을 제대로 전달하면 족하다〉 중에서
曾子曰 以能問於不能 以多問於寡 有若無 實若虛 犯而不校 昔者 吾友?從事於斯矣
증자왈 이능문어불능 이다문어과 유약무 실약허 범이불교 석자 오우상종사어사의
사람인 이상 누구에게나 부족한 면이 있고 누구든 저마다 한계가 있다는 사실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뛰어난 사람은 자신은 물론 타인의 한계도 인정한다. 하지만 상대의 잘못을 비난하는 데 열중하는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논어》 에 실려 있는 “군자는 남의 장점을 키워주고 단점은 막아준다. 소인은 이와 반대로 한다”가 말해주는 바와 같다. 다산이 말하는 대인관계의 해답도 같다. 반드시 먼저 베풀 수 있어야 한다고 두 아들을 가르쳤다. “남이 먼저 내게 다가오기를 바라는 것은, 너희들의 오만한 근성이 아직도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는 적용하지 못하는 엄격한 기준을 타인에게 들이대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 것은 수양의 부족이라는 지적이다. 오늘을 품고자 하는 자는 어제의 실수를 품을 수 있어야 한다.
_〈누구나 지옥을 걷고 있으니 타인에게 관대하라〉 중에서
勿以惡小而爲之 勿以善小而不爲
물이악소이위지 물이선소이불위
장괴애가 숭양현의 현령을 지낼 때 관아의 창고지기가 돈 한 푼을 훔치는 현장을 잡았다. 장괴애가 창고지기를 장형에 처하자, 창고지기는 “이까짓 동전 한 닢으로 매질을 하다니요?”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자 장괴애는 “하루에 돈 한 푼이 천 일이면 천 푼이 된다. 노끈으로 나무를 자를 수 있고, 낙숫물이 댓돌을 뚫을 수 있는 것과 같다”라고 하며 그를 처벌했다. 《소학지언》 에서 다산은 “악이 작다는 이유로 행해서는 안 되며 선이 작다는 이유로 행하지 않아서도 안 된다는 경계는 《주역》 〈계사전〉에서 나왔다”라고 그 출처를 밝히기도 했다. 일상에서 사소한 악과 마주했을 때 ‘착한 사람이 되어라!’라는 너무나 당연한 도리를 떠올리는 것은 정말이지 쉽지 않은 일이다. 악은 너무나 쉽고 흔하다. 그러나 악당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지 않는다.
_〈악은 ‘평범함’과 ‘사소함’이라는 가면을 쓴다〉 중에서
某自守官以來 常持四字 勤謹和緩
모자수관이래 상지사자 근근화완
황상이 처음 다산을 찾아왔을 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저에게는 세 가지 단점이 있습니다. 너무 둔하고, 앞뒤가 꽉 막히고, 사리분별을 못합니다.” 그러자 다산은 이렇게 가르쳐줬다. “배우는 사람에게는 큰 병통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 한 번 보고 척척 외우는 사람은 그 뜻을 음미하지 않아 금세 잊어버린다. 둘째, 제목만 던져 줘도 글을 짓는 사람은 똑똑할지언정 글이 가볍다. 셋째, 한 마디만 해도 금세 알아듣는 사람은, 곱씹지 않아 깊이가 없다.” 당장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또 단기적인 실적에 집착해서 초조해할 것도 없다. 처음에는 반짝반짝 빛나던 인물들이 어느 순간부터 사라지는 까닭은 모두 초조함과 조급함 때문이다. 어떤 일이든 눈앞의 성과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자기가 맡은 일을 묵묵히 해내면서, 꾸준히 자신을 연마하는 사람이 결국에는 이긴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그리고 꾸준함이다. 옳은 방향으로 쉬지 않고 갈 수 있다면 결국 일은 이루어진다.
_〈느리기에 방향이 확실하고 무겁기에 발자국이 깊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