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OECD 국가 중 최장의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그럼에도 주 52시간제 등의 노동시간 정책은 개선되지 않고, 평범한 사람들은 충분히 쉬지 못한 채 힘겹게 일상을 버텨낸다. 이 책은 일로 인한 불안과 피로에서 벗어나 ‘나를 살리는 시간’으로서 안식이 우리 삶에 갖는 의미에 주목한다. 개인, 심리, 사회, 역사, 일상의 영역에서 우리가 쉬지 못하는 이유를 밝히고 가치 있는 쉼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쉬어야 우리의 삶과 사회가 성숙할 수 있는지 방향을 제시한다. 인생의 주인이 되는 여정으로서 안식의 새로운 의미를 고찰하는 이 책은 일을 멈추었을 때에야 비로소 보이는 더 넓은 삶의 지평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목차
책 속으로
들어가는 글
이 책은 쉬지 못하고 과로로 내몰리는 사람들의 문제에 주목하며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쉬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나는 그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파악한다. 하나는 자본주의라는 사회경제 체제와 그 체제에서 비롯한 빈곤, 불평등 같은 사회적인 요인이다. 또 하나는 사회 구성원인 개인들의 욕망과 불안을 축으로 하는 심리적인 요인이다. 이 두 가지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래서 사회만 개혁한다고 해서 쉴 수 있는 게 아니고, 개인이 변하는 것만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이 책에서는 그 두 요인을 중심으로 우리가 쉬지 못하는 ─또는 쉬지 않는─ 현실을 살펴보고 대안을 찾아보려고 했다.
--- p.9
“한국 사람들은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한국인들이 겪은 가장 큰 트라우마는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학교에서, 학원에서 공부에 내몰렸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제 어디서나 듣는 소리가 “공부하라”는 한마디였다. 아마 한국인들이 어렸을 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공부 잘하고 있니?”였을 것이다. ‘공부’밖에는 들은 게 없다고 할 정도이다. 공부를 학교에서 하는 것도 모자라 학원에서 하고, 과외 받으며 하고, 집에서도 했다. 학교가 끝나면 집에 가는 게 아니라 학원이나 독서실로 갔다. 직장에서 6시가 퇴근 시간이 아니라 야근 시작 시간인 것처럼 학창시절 하교 시간인 4시는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직장에서의 주말 근무는 학창시절의 학원 주말반과 같다. 어렸을 때부터 이미 9시 출근, 10시 퇴근, 주말 근무가 체질화되었다.
--- p.24
“천국보다 세속을, 도덕보다 성공을”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삶은 일요일에 교회나 성당에 가는 것으로 대신하고, 평소에는 자신을 위한 삶과 물질적인 부와 현세적인 행복을 추구했다. 누구를 위한 삶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삶을, 미래를 위한 삶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살았다. 현세에서의 자기실현 또는 자기성취가 목표가 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직업과 더 넓게는 삶 전체를 교회나 도덕이 아닌 그 자체의 이치에 따라 인정하고, 개개인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추구함으로써 근대인들은 일에 매달리고 과중한 노동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욕망을 충족하려면 현실의 벽을 넘어야 하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쳐야 했고, 그를 위해 우선 자기 자신과 싸워야 했다. 이 모든 게 자기 분야에서의 실력과 실적, 성과로만 가능했기 때문에 근대인들은 일을 삶 자체로 여기며 집중하고 몰두했다. 근대인들은 그렇게 ‘과로’를 일상화하고, ‘쉼’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을 자초했다.
--- p.53
“나는 자유롭다, 그러므로 불안하다”
신이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로,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선택했다는 예정론이 퍼져나가면서 대중은 당황했다. 각자의 미래와 운명을 생각하며 번민하게 된 것이다. 나는 구원으로 예정되었을까, 영벌로 예정된 건 아닐까 하는 염려에서 타인을 돌볼 여유가 사라졌다. 칼뱅이 의도했던 예정론은 그런 게 아니었으나, 점차 원래 교리의 초점과 의미를 잃고 통속화된 예정론은 대중의 불안을 자극하고 신에 대한 의무와 헌신을 강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구원을 자기 자신의 행실과 삶의 결과에서 찾는 경향이 생겨났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삶에서 어떤 결과를 거두는지가 중요해졌고, 사람들은 그런 데서 구원의 증거를 구하게 되었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신 앞에서의 구원을 위해 개인들은 신의 요구와 뜻을 따르며 그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더욱 성실하고 근면한 생활을 영위했다. 개인의 부와 성공이 신의 은혜의 표시가 되고, 영원한 예정과 구원의 증거로 여겨졌다.
--- pp.57~58
“나의 결핍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욕망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파괴할 운명을, 또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아이들은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던 자기 장난감을 다른 아이가 가지고 놀려고 하면 갑자기 그 장난감을 소중하게 여기며 지키려고 한다. 욕망은 내가 탐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같은 것을 다른 사람이 탐내거나 소유하려 할 때 발생한다. 그래서 욕망은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게 만들고, 관계를 힘들고 위험하게 한다. 자기 만족을 위해 발동되는 욕망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해침으로써 부메랑처럼 돌아와 불행과 불만, 불안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 p.86
“나는 나를 둘러싼 명령에서 자유로운가?”
초자아의 가치는 이전 세대, 부모를 대표로 하는 기성사회의 가치이다. 그러나 시대는 변하고 가치관도 그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우리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현재 우리가 사는 포스트모던, 근대 이후 시대는 하나의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다. 이전보다 훨씬 더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고, 그 결과 사람들의 삶의 스펙트럼도 매우 넓어졌다. 삶의 성공 여부도 남들을 꺾고 올라서서 일등을 하기보다는 일 자체에서 오는 만족과 기쁨을 누리는 데 두기도 한다. 남들이 알아주건 말건 내가 만족하면 성공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아졌다. 기존 사회의 일률적인 가치나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초자아에 맞서서 자신의 뜻과 의지, 욕동을 펼치는 데서 얻는 만족과 즐거움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 p.129
“일을 멈추는 것은 휴식 그 이상의 의미다”
유대인은 안식일을 ‘사바트Sabbath’라고 하는데, 사바트에는 ‘그치다, 멈추다, 중지하다’라는 뜻이 있다. 안식일, 즉 사바트는 태초에 신이 창조를 마친 후에 일을 멈췄다는 데서 유래한다. 일을 멈춰야 쉴 수 있다는 건 당연한 이치다. 쉼 자체가 일을 멈추는 것, 중단이다. 그런데 그게 어려운지 일을 멈추지 못하고 계속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여러 가지 이유가 있고 대안을 모색해볼 수도 있겠지만, 결국 쉼을 현실화하는 것은 개인의 결정과 실천에 달려 있다. 쉼은 일을 멈추는 ‘결행’으로 가능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 어떤 대안도 대안이 되지 못한다.
--- pp.141~142
“시간에 맞출 것인가, 시간을 주도할 것인가”
시간은 조건이나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성격이 있다. 심지어 질적으로 전혀 다른 특별한 차원까지도 가진다. 시간이라고 다 같은 시간이 아니고, 같은 시간을 살아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의 시간이 펼쳐질 수 있다.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 즉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두 같은 시간 속에 있다 해도 주관적으로는 의미가 달라진다. 삶의 재미나 가치나 차원도 달라진다. 사람이 시간의 창조자가 되고 자유로운 주인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열린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을 스스로 주도해야 한다. 직접 나의 시간을 살아갈 수 있도록 스스로 조율한다는 뜻이다. 바로 시간의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되고,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되는 길이다.
--- pp.151~152
“인생이라는 학교에서 공부하자”
휴일은 인간 본연의 삶, 생명을 위해 존재한다. 일로부터 자유를 찾고, 또한 생명을 위한 자유, 참 삶을 향한 자유를 추구하는 날이다. 그래서 휴일에는 삶을 생각한다. 그 삶을 사는 자신을 생각하고, 자신을 포함해서 수없이 많은 이웃 존재들의 생명과 삶을 생각한다. 그 삶들이 함께 얽혀 만들어내는 큰 생명, 온 생명을 생각하고 그 안에서의 자신을 성찰한다. 온 생명에 맞닿은 삶을 이해하고 실제로 그런 삶을 살며 자신의 이야기를, 역사를 만들어간다. 이게 휴일에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다.
이 책은 쉬지 못하고 과로로 내몰리는 사람들의 문제에 주목하며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쉬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나는 그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파악한다. 하나는 자본주의라는 사회경제 체제와 그 체제에서 비롯한 빈곤, 불평등 같은 사회적인 요인이다. 또 하나는 사회 구성원인 개인들의 욕망과 불안을 축으로 하는 심리적인 요인이다. 이 두 가지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래서 사회만 개혁한다고 해서 쉴 수 있는 게 아니고, 개인이 변하는 것만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이 책에서는 그 두 요인을 중심으로 우리가 쉬지 못하는 ─또는 쉬지 않는─ 현실을 살펴보고 대안을 찾아보려고 했다.
--- p.9
“한국 사람들은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한국인들이 겪은 가장 큰 트라우마는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학교에서, 학원에서 공부에 내몰렸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제 어디서나 듣는 소리가 “공부하라”는 한마디였다. 아마 한국인들이 어렸을 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공부 잘하고 있니?”였을 것이다. ‘공부’밖에는 들은 게 없다고 할 정도이다. 공부를 학교에서 하는 것도 모자라 학원에서 하고, 과외 받으며 하고, 집에서도 했다. 학교가 끝나면 집에 가는 게 아니라 학원이나 독서실로 갔다. 직장에서 6시가 퇴근 시간이 아니라 야근 시작 시간인 것처럼 학창시절 하교 시간인 4시는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직장에서의 주말 근무는 학창시절의 학원 주말반과 같다. 어렸을 때부터 이미 9시 출근, 10시 퇴근, 주말 근무가 체질화되었다.
--- p.24
“천국보다 세속을, 도덕보다 성공을”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삶은 일요일에 교회나 성당에 가는 것으로 대신하고, 평소에는 자신을 위한 삶과 물질적인 부와 현세적인 행복을 추구했다. 누구를 위한 삶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삶을, 미래를 위한 삶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살았다. 현세에서의 자기실현 또는 자기성취가 목표가 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직업과 더 넓게는 삶 전체를 교회나 도덕이 아닌 그 자체의 이치에 따라 인정하고, 개개인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추구함으로써 근대인들은 일에 매달리고 과중한 노동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욕망을 충족하려면 현실의 벽을 넘어야 하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쳐야 했고, 그를 위해 우선 자기 자신과 싸워야 했다. 이 모든 게 자기 분야에서의 실력과 실적, 성과로만 가능했기 때문에 근대인들은 일을 삶 자체로 여기며 집중하고 몰두했다. 근대인들은 그렇게 ‘과로’를 일상화하고, ‘쉼’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을 자초했다.
--- p.53
“나는 자유롭다, 그러므로 불안하다”
신이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로,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선택했다는 예정론이 퍼져나가면서 대중은 당황했다. 각자의 미래와 운명을 생각하며 번민하게 된 것이다. 나는 구원으로 예정되었을까, 영벌로 예정된 건 아닐까 하는 염려에서 타인을 돌볼 여유가 사라졌다. 칼뱅이 의도했던 예정론은 그런 게 아니었으나, 점차 원래 교리의 초점과 의미를 잃고 통속화된 예정론은 대중의 불안을 자극하고 신에 대한 의무와 헌신을 강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구원을 자기 자신의 행실과 삶의 결과에서 찾는 경향이 생겨났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삶에서 어떤 결과를 거두는지가 중요해졌고, 사람들은 그런 데서 구원의 증거를 구하게 되었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신 앞에서의 구원을 위해 개인들은 신의 요구와 뜻을 따르며 그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더욱 성실하고 근면한 생활을 영위했다. 개인의 부와 성공이 신의 은혜의 표시가 되고, 영원한 예정과 구원의 증거로 여겨졌다.
--- pp.57~58
“나의 결핍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욕망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파괴할 운명을, 또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아이들은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던 자기 장난감을 다른 아이가 가지고 놀려고 하면 갑자기 그 장난감을 소중하게 여기며 지키려고 한다. 욕망은 내가 탐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같은 것을 다른 사람이 탐내거나 소유하려 할 때 발생한다. 그래서 욕망은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게 만들고, 관계를 힘들고 위험하게 한다. 자기 만족을 위해 발동되는 욕망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해침으로써 부메랑처럼 돌아와 불행과 불만, 불안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 p.86
“나는 나를 둘러싼 명령에서 자유로운가?”
초자아의 가치는 이전 세대, 부모를 대표로 하는 기성사회의 가치이다. 그러나 시대는 변하고 가치관도 그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우리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현재 우리가 사는 포스트모던, 근대 이후 시대는 하나의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다. 이전보다 훨씬 더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고, 그 결과 사람들의 삶의 스펙트럼도 매우 넓어졌다. 삶의 성공 여부도 남들을 꺾고 올라서서 일등을 하기보다는 일 자체에서 오는 만족과 기쁨을 누리는 데 두기도 한다. 남들이 알아주건 말건 내가 만족하면 성공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아졌다. 기존 사회의 일률적인 가치나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초자아에 맞서서 자신의 뜻과 의지, 욕동을 펼치는 데서 얻는 만족과 즐거움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 p.129
“일을 멈추는 것은 휴식 그 이상의 의미다”
유대인은 안식일을 ‘사바트Sabbath’라고 하는데, 사바트에는 ‘그치다, 멈추다, 중지하다’라는 뜻이 있다. 안식일, 즉 사바트는 태초에 신이 창조를 마친 후에 일을 멈췄다는 데서 유래한다. 일을 멈춰야 쉴 수 있다는 건 당연한 이치다. 쉼 자체가 일을 멈추는 것, 중단이다. 그런데 그게 어려운지 일을 멈추지 못하고 계속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여러 가지 이유가 있고 대안을 모색해볼 수도 있겠지만, 결국 쉼을 현실화하는 것은 개인의 결정과 실천에 달려 있다. 쉼은 일을 멈추는 ‘결행’으로 가능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 어떤 대안도 대안이 되지 못한다.
--- pp.141~142
“시간에 맞출 것인가, 시간을 주도할 것인가”
시간은 조건이나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성격이 있다. 심지어 질적으로 전혀 다른 특별한 차원까지도 가진다. 시간이라고 다 같은 시간이 아니고, 같은 시간을 살아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의 시간이 펼쳐질 수 있다.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 즉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두 같은 시간 속에 있다 해도 주관적으로는 의미가 달라진다. 삶의 재미나 가치나 차원도 달라진다. 사람이 시간의 창조자가 되고 자유로운 주인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열린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을 스스로 주도해야 한다. 직접 나의 시간을 살아갈 수 있도록 스스로 조율한다는 뜻이다. 바로 시간의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되고,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되는 길이다.
--- pp.151~152
“인생이라는 학교에서 공부하자”
휴일은 인간 본연의 삶, 생명을 위해 존재한다. 일로부터 자유를 찾고, 또한 생명을 위한 자유, 참 삶을 향한 자유를 추구하는 날이다. 그래서 휴일에는 삶을 생각한다. 그 삶을 사는 자신을 생각하고, 자신을 포함해서 수없이 많은 이웃 존재들의 생명과 삶을 생각한다. 그 삶들이 함께 얽혀 만들어내는 큰 생명, 온 생명을 생각하고 그 안에서의 자신을 성찰한다. 온 생명에 맞닿은 삶을 이해하고 실제로 그런 삶을 살며 자신의 이야기를, 역사를 만들어간다. 이게 휴일에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다.
--- p.174